(redz!) 뒤척이다 <내가 사는 피부>를 생각하다 영화




잠자리에서 잠시 뒤척이다 며칠 전 관람한 <내가 사는 피부>의 라스트신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 신이 작품 중 가장 알모도바르다운 장면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나자 잠이 더욱 멀리 달아났다. 결국 잠이 올때까지 블로그에 글을 쓰기로 한다. 마감 기간인데 난 왜 오밤중에 블로깅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사는 피부>의 시놉시스는 더없이 알모도바르적이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접하면, 스크린 속의 공기는 그 동안의 알모도바르 영화와 딴판이다. 극단적인 색채와 기괴한 피사체들이 만들어 온 묘한 아름다움이 없다. 각 신은 멋지지만, 작가 고유의 붓터치가 보이지 않는다. 아무런 정보 없는 관객에게 이 영화의 한 장면을 보여줬을 때 알모도바르의 것임을 눈치챌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영화는 줄거리를 따라가기 급급하다.

그 줄거리도 문제다. 성형외과 의사가 집안에 미모의 여성 베라를 가둬놓고 쫄쫄이만 입힌 채 강화피부 생체실험 대상으로 사용하는데 어느 날 호랑이 분장을 한 강도가 집에 숨어들고, 이 강도는 여자 하인의 아들이며, 베라를 강간하다 뒤늦게 들어온 의사에게 총 맞아 죽고, 알고 보니 의사와 호랑이는 이복 형제이며 의사의 아내가 호랑이와 바람난 적이 있고, 또 알고보니 베라는 비센테라는 남자를 의사가 성전환시킨 존재인데 이는 비센테가 의사의 딸을 강간하려다 실패, 결국 딸의 자살을 유발한 놈이기 때문이다...  < 스포일러
대체 이보다 더 알모도바르적인 설정이 가능한가? 하지만 도가 지나쳤다. 완벽하게 미쳐 있는 세계를 만들어내다보니, 괴상함과 평범함 사이에서 발생하는 알모도바르 특유의 활력이 사라졌다. 특히 괴상한 외피를 쓰고 있지만 소박한 미덕을 품고 있는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아그라도처럼 사랑스러운 인물이 없다.

...여기까지가 영화를 본 직후 든 느낌이었다. 요약하자면 알모도바르의 향이 휘발된, 보통 야한 스페인 예술영화.

그런데 잠자리에 누워 정신이 나가길 기다리던 나는, 웬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영화의 라스트신이 얼마나 알모도바르다웠는지 알게 됐다.
말썽부리던 아들이 여자가 되어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오는 신. 어머니에게 "제가 비센테에요"라고 말하는 대사를 마지막으로 영화는 더 이상의 설명 없이 갑작스럽게 자막을 올려버린다. 그 옆에는 어머니의 애인이자 비센테가 남자일 때 치근덕대던 여성이 서 있다. 이 장면은 알모도바르가 가장 잘 다루는 몇가지 관계를 품고 있는데 모자관계(그리고 성전환을 통해 이제 모녀관계가 된)와 모성애, 피가 섞이지 않은 여자간의 연대, 성 정체성이 애매해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간의 조우와 연대 등이 그것이다. 그들 사이에 오가는 눈빛은, 영화 전체의 차가운 톤과 달리 정념에 차 있다. 단 한 번의 삼자대면으로 알모도바르는 자신의 인장을 찍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걸 이제야 알아채다니! 원래 인장이라는 건 그림을 다 그린 뒤 마지막에 쾅 찍는 도장 아니던가. 이 라스트신은 말 그대로 인장이었다.
그리고 베라와 두 여성이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지는 이제까지의 알모도바르 영화가 말해준다. 자막이 올라가는 뒤편에서는 괴상하지만 아름다운 연대의 드라마 한 편이 시작될 것이다.

라스트신이 새로운 의미를 갖는 순간 내 마음속의 별점이 반 개 올라갔다.

★★★☆



덧글

  • 2012/01/10 18:3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쑥대밭 2012/01/16 20:49 #

    그냥 제 느낌이에요
    그 대사랑, 둘이 나누는 대화나 비센테까지 셋이 있는 숏에서
    그런 공기를 느꼈어요.

    다연히 연인이라고 생각했는데
    ... 음... 연인이 아닌가?
  • 앨리스 2012/01/11 01:24 # 답글

    독거미 읽으려고 책상앞에 써놨었는데 포스팅 괜히봤네요 ㅜㅜ
  • 쑥대밭 2012/01/16 20:50 #

    전 안 읽었는데요
    각색이 심해서 내용이 엄청 다르다고 하더군요
    책상에 붙인대로 실천하셔도 될듯 ^^
  • hispe 2012/12/31 20:41 # 삭제 답글

    개인적으론 독거미가 헐씬 나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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