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인은 슈퍼히어로 장르를 두들겨팼다 영화


이미지 출처 cine21.com

* 스포 많음

새로 등장하는 배우와 캐릭터들을 숨가쁘게 소개하는 프레젠테이션처럼 초반이 흘러간다. 

베인의 첫 등장은 조커의 등장만큼 귀기어린 장면은 아니다. 영화 내내 보여주는 카리스마도 조커에 못미친다. <다크나이트라이즈>에 조커가 없다는 이유로 전작만 못하다고 느낀 관객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단 한 장면, <나이트폴>에서 가져온 베인과 배트맨의 대결만큼은 조커가 보여주지 못한 압도적 경험을 선사했다. 사이코 범죄자 위주인 고담의 빌런들 중에서 베인은 유일하게 배트맨을 압도하는 육체를 지닌 사나이다. 두뇌 싸움의 긴장이 아닌, 몸과 몸이 맞부딪치는 물질적 긴장감을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악당이라는 뜻일 테다. 배트맨의 가면이 부서지고 허리가 부러질 때 관객은 충격을 받게 된다. 그 활동사진의 긴장감만큼은 원작 만화를 뛰어넘었(다고 느꼈)다. 
얻어터지는 배트맨이 선사한 몰락의 이미지는 곧 고담 전체로 전이된다. 아이맥스 영상으로 고담 곳곳의 지반이 무너지고 다리가 끊기는 장면을 보자면 무너진 배트맨이 연상될 수밖에 없다. <라이즈>의 고담이 트릴로지 중 가장 위태로워 보이는 것은, '마지막편답게 사건의 스케일을 키워서'라기보다 '비로소 배트맨과 고담이 물질적인 위협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베인은 그래서 무섭다. 요약하자면 조커는 정신을 가지고 장난치는 놈, 베인은 물질을 가지고 장난치는 놈.

라스 알굴과 탈리아 알굴이 필요한지는 의문이다. 원작의 베인은 주체할 수 없는 폭력성과 지배욕으로 뭉친 영리한 짐승이다. 영화의 베인은 라스 알굴의 유지를 잇는 과격 혁명분자로 바뀌었다. 하지만 별로 무시무시하지 않았던 <배트맨비긴즈>의 라스 알굴이 다시 소환되는 순간, 베인의 카리스마도 그만큼 깎여나간다. 라스 알굴은 배제하고, 베인 캐릭터 자체를 각색해서 혁명분자로 만드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심지어 베인과 탈리아의 러브스토리가 등장하는 순간, 베인의 범죄 동기는 사랑이라는 - 지나치게 납득 가능하고 익숙한 - 평범한 단어로 요약된다. 그리고 영화의 빌런이 베인에서 탈리아로 옮겨간 뒤라 그런지, 놀란은 베인의 최후를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묘사한다. 배트맨 허리를 부러뜨린 베인을 이런 식으로 보내도 되는건가?

이건 사실 놀란표 트릴로지를 관통하는 약점이다. 세 편 모두 두 명의 빌런이 등장하는데 분량이나 존재감 조절이 줄곧 형편없다. <비긴즈>에서는 라스 알굴에 밀려 스케어크로가 안습 신세였고, <다크나이트>에서는 하비 덴트의 존재감이 조커에 묻혔다. 이번 <라이즈>에서는 분량 많은 베인과 갑자기 등장한 끝판왕(인데 엄청 약함) 탈리아가 서로의 존재감을 침범하고 있다. 조커 캐릭터에 감탄했던 많은 사람들이 막상 조커의 최후를 기억하지 못하는건 아마도 그래서다. 혹시나 놀란이 배트맨 프랜차이즈로 돌아온다면, 그땐 한 명의 빌런으로 끝까지 밀어붙였으면 좋겠다. 

이 영화에도 <다크나이트>처럼 철학(혹은 철학 흉내)적 딜레마가 있다. 다만 전작에 비해 훨씬 피상적이고 단순한 차원으로 내려와 있다. 혹자는 <다크나이트>를 새로운 <대부>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라이즈>가 <대부2>가 되길 바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라이즈>는 이 트릴로지를 닫는 법에 대한 훌륭한 답안이긴 해도 <대부2>가 되지는 못했다. 영화 구조를 봐도 마찬가지다. <다크나이트>는 유일한 영화였지만 <라이즈>는 좀더 평범한 블록버스터다.
어쩌면 베인이 조커보다 형이하학적인 악당인만큼 철학놀이가 피상적이 된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 장면은 하비 덴트에 대한 비밀이 베인의 입을 통해 폭로되는 부분이었다. 고든이 미처 읽지 못한 고백문을 베인이 읽는 순간 고담의 거짓 질서는 당위성을 잃는다. 선악이 뒤섞인 상태였던 <다크나이트>의 주제의식에 대고 다시 한번 총질을 하는 꼴이다. 전편과 후편이 조응한다는 점에서 즐길 여지가 많았다. 블레이크가 고든을 비난하는 장면을 통해 선악은 다시 한번 혼동된다. 

앤 해서웨이는 그만의 캣우먼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블레이크가 순수한 '디텍티브'로 등장하는건 굉장히 배트맨스럽다. 
'더 배트'를 비롯한 무기들은 보면 볼수록 밀덕 등 각종 덕후들을 공략하기 좋아 보인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것은 베인의 혁명성이다. 영화 초반 경찰에 쫓기는 배트맨은 마지막에 이르러 결국 공권력과 힘을 합친다. 문제는 그들 앞에 선 베인의 탈옥수들에게 나름의 명분 - 하비덴트법의 희생양이라는 - 이 있다는 점이다. 이 '전쟁'을 보며 배트맨과 경찰병력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들지 않는다.
많은 슈퍼히어로 만화와 영화들이 작품에 성조기를 등장시켜 왔다. 그들은 곧잘 '정의' 대신 '미국적 가치'라는 표현을 쓴다. 상당수의 슈퍼히어로들이 '진정한 미국'을 위해 싸운다. 하지만 미국 바깥의 사람들이 보기에 그 잘난 가치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을수밖에 없다. <라이즈>는 이 점을 부각시킨다. 여느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미국vs테러범의 구도라면 미국이 분명 '착한놈'이다. 하지만 미국vs미국에탄압받은범죄자 의 구도라면 선뜻 전자의 손을 들기 머쓱해진다. 베인에게는 명분이 있다. 
<라이즈>의 베인이 나름의 명분을 지닌 악당이라는 점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슈퍼히어로 장르 자체에 대한 메타 공격으로 느껴진다. 이 영화에도 성조기가 등장한다. 다만 훼손된채 등장한다는 점이 다르다. 배트맨은 '온전한 미국적 가치'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고담에서 싸운다. 영화는 배트맨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 고담 바깥의 새 거처를 마련해줘야만 했다. 배트맨/브루스웨인은 결국 고담에서의 삶을 되찾지 못했다. 

나름의 별점을 매기자면... 네개 정도?


덧글

  • 2012/07/25 20:11 # 삭제 답글

    흐음.. 4개씩이나? 주시다녀.. 점수가 많이 후하셨음
    그건 그렇고 글은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갠적으론
    무엇보다 베인이 혁명을 하면서 죄수 뿐만이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진정한 고담을 되돌려주겠다고 했는데, 그게 정신병자의 형이상적인 망상이 아니라 적어도 진심이었고 명분에 근거한 거였다면, 그러한 베인의 실질적인 행위가 시민들에게 어떤 형태로든-그게 일종의 자의적 선의 강요였든 간에- 영화 안에서 극화됐어야 하는데 그게 없었다는 점이 가장 아쉽네요. 가령 예를 들어 시민 법정을 구성하는 판사 말입니다. 전작의 미치광이 박사가 판사역을 맡지요. 물론 악당의 활용이라는 점에선 납득이 되는데, 그대신에 시민 중에서 가장 언변이 뛰어나거나 광적인 혁명성을 보이며 악당에게 변절하는 그런, 기회주의자를 판사로 가려 뽑았다는 설정을 보여주면 더 좋았지 않나 싶은 거죠. 다시말해 베인의 혁명이 베인의 혁명에 의해 직접적인 수혜를 입는 탈옥 죄수들 뿐만 아니라, 베인에 의해 목숨을 위협받는 시민들 일부 또는 거의 절반에게도 침식하였으면 영화의 퀄릿이 더 높아졌을 거라는 점입니다. ...

    아무래도 이번 영화는 감독이 영화의 중심축을 제시해놓고도 그 중심축에 대한 해답은 꺼내놓지 않고, 아주 피상적인.. 히어로물 완결용 정답 공식에 근거해서 욕 안 먹을 정도로만 뻔한 이야기만 마지못해 흘려놓다가 영화를 불만족스럽게 끝낸 케이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 전체가 너무 산만하고, 그냥 액션만 있고, 카타르시스가 느껴지지 않아요. 설령 그럴까하다가도 사그라들어버리죠. 말씀하신대로 너무 작위적이거나 생뚱맞은 설정들 때문입니다.
  • 2012/07/25 20:15 # 삭제

    그리고 제일 이 영화의 패착은 로빈의 존재입니다. 배트맨의 히어로로써의 존재가 과연 고담 시민들의 주체적인 시민 역량 질서에 부합되는가? 히어로는 계속 히어로여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을 다크나이트에서 보여주었고, 그 대답은 라이즈의 결말에서 주인공이 배트맨을 그만두는 것으로 나왔죠. 그런데 로빈이라는 캐릭터를 영화 마지막에 제시함으로써 영화가 이제까지 3편에 걸쳐서 질질끌어온 문제의식-해답의 고리가 완전히 파괴되어버립니다.
    간단히 말해 배트맨은 배트맨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떄문에, 배트맨이 바로 시민 하나하나의 용기로써 치환되었기 떄문에, 배트맨은 진저한 안식을 얻는다. 즉, "히어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결말을 제시해놓고, 다시 "로빈"이라는 히어로가 등장했다는 것. 그것은 "히어로는시민들에게 여전히 필요하다"는 모순된 설정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여전히 히어로가 필요하다면 배트맨은 은퇴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영화가 내놓은 결말이 의미가 없어지고, 관객은 허탈해지는 순간이죠. 쩝..
  • 00 2012/07/25 20:28 # 삭제

    이 등신같은 영화에 너무 골몰하지 마세요.

    부러 최대한 걸맞는 분석 안해주셔도 충분히 등신같은 영홥니다.
  • 2012/07/25 21:08 # 삭제

    00/실은 지난 일요일에 시간 내서 찌는 여름 참고 영화관 가서 본 영화라서 그렇습니다 ㅜㅜ
  • 쑥대밭 2012/07/26 15:40 #

    말씀하신 미치광이 박사가 스케어크로/크레인이죠. 다른 빌런이 까메오처럼 등장하는건 원작의 영향일 겁니다. 배트맨의 빌런들이 동시에 말썽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죠. 한놈이 말썽부리면 다른 놈이 동조하는 경우도 많고.

    히어로물 완결용 공식에 너무 충실한게 시리즈의 아우라를 좀 갉아먹었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 잠본이 2012/07/26 23:00 #

    애초에 베인의 의도는 혁명을 가장한 끔살(...)이었으니 중반까지는 잘 돌아간 편이라고 보는데, 그 혼란의 와중에 고담이 어떻게 변했나가 너무 대충대충 묘사되었고(이건 초반부에 이놈저놈 소개하다보니 시간을 엄청 잡아먹어서) 후반에 베인의 숨은 배후가 갑툭튀하면서 얘기의 중심이 휘청거리는 느낌이 들어서 문제였죠.

    애초에 놀란은 어떻게 나락까지 떨어진 브루스가 부활하여 영생을 찾나(...)에 중점을 둔거라 혁명은 순전히 장식으로 내걸어둔 배경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습니다.
  • ^^; 2012/07/25 23:24 # 삭제 답글

    그 사이에 낀 고담 사람들은 뭔 죄요.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지.^^:;
  • 원더바 2012/07/26 00:44 # 답글

    성조기 하니 생각났는데 막판에 베인에게 꽁꽁묶이고 정부가 버려둔 무너진 고담에서 펄럭이던 성조기는 갈갈이 찢겨있었죠. 어지간한 슈퍼히어로물에서 나오지 않는듯한 장면이라 기억납니다
  • 쑥대밭 2012/07/26 15:41 #

    네. 그 훼손된 성조기는 꼭 "다른 히어로무비와 달라야돼"라는 제작진의 강박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 잠본이 2012/07/26 23:01 # 답글

    사실 정말로 히어로 장르를 패대기친 건 다크나이트 쪽이죠. (사실상 악이 승리하는 결말이었던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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